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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운명, 자유의지 (1)

최근에 한 친구와 새벽에 영웅은 공부따윈 하지 않아라는 느낌으로 이야기하다보니 인간 본성론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순자라는 인물의 선악 개념이었다. 흔히들 순자 하면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는데 정작 그 악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들었을때 떠올리는 바로 그 개념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공교육 단계에서는 접하기 힘들다.

 

그에 의하면 순자의 악 개념은 바로 egocentric 이라고 한다. 자기 중심성이 강한 정도?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자면 또 너무 길어지니 사례로 대체해본다. 어느 성교육 강사가 감옥에 출장을 갔다와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아마도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교화 관련 수업이었던거 같다 + 배경이 한국인지 외국인지도 모르겠고) 자기는 억울하고 잘못이 없다고 가장 순수하게 억울해하던 사람의 죄명이 아동강간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 아이가 자기를 유혹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즉 염치 없음이라는 것은 말 그래도 양심의 가책을 5를 느낄 상황에서 억지로 그 이상을 깎아서 마이너스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행동에 대한 가책 자체를 0에 수렴하게 적게 받는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에 화답하여 출처를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동양의 어느 재판에서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했는데(친구 말로는 자기도 분명 그런 이야기를 보긴 했으나 출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 지나가던 누군가 아는 분 있다면 댓글 부탁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파렴치한 존속살해자에 관한 재판이었다. 귀한 자식이라고 오냐오냐 키우다보니 아이가 너무 버릇이 없어진 나머지 아버지를 직접 죽이고도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르고 있더라는 이야기. 보통 같으면 저런 찢어죽일 하면서 극형을 내렸겠지만 재판을 담당했던 관리는 그 죄수를 죽이는 대신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죄수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며 죽여달라고 자처했다는 것이다.

 

악을 그렇게 정의하면 유가에서 강조한 예의의 개념도 새롭게 보인다. 즉 예라는 것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인식체계에 타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가르침의 총체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핵심에 시와 음악이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응'이 중요한 분야이기에. 새벽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내 뇌가 격렬하게 파업해서 새로운 지식이 머리에 들어오길 거부하고 있다는 핑계로 생각을 좀 더 갈무리해 보았다. 그것은 바로 운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이다.

 

흔히들 양자역학과 확률적 해석의 도입으로 인과론적 세상 이해는 끝장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시계의 불확정성은 거시계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입자들끼리의 얽힘이 매우 강해짐에 따라서 사실상 우리가 이해하는 모습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 급진적인 이해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를 비롯한 몇몇의 철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자유라는 감각은 마치 돌멩이가 허공에서 떨어지다가 잠시 자아를 갖게 되었을때 자유롭게 날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심. 가령 내가 갑자기 이 밤에 잠에서 깨어 이 짓을 하는 것이 얼핏 보면 자유 의지에 기한 것일지 몰라도 사실 그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요소들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식체계가 세상의 모든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담아낼 수 없기에 존재하는 공백에서 오는 착각과도 같은 감각 내지는 개념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어쩌면 이러한 인과관계의 누적에 의해 굴러가는 인생의 수많은 부분이 일종의 운명 내지는 업이라는 개념으로 고대인들에게 포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한편으로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이 개념에 대하여 쓰려다 보니 새벽 3시가 된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또 시간이 날 때 계속하기로 한다. 만약 운명의 사슬이 우리를 속박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다뤄야 할 것인가? 근대 이후 과학의 전진 시기에 이르러서는 마치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마냥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위대한 인간상이라 여기는 것이 문명 세계에서는 건전한 생각이 된 것 같으나 난 그러한 개념이 100퍼센트 폐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배경에서 신이나 초자연적인 의지를 지워도 인과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인간의 선택이나 의지가 무용하다고 믿지도 않는다. 다음 글은 그 부분에 대해 다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