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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야기

신념에 대하여

며칠 전 인생의 신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었는데 그 순간 그때 머리에 스쳐간 많은 생각들을 전할 수는 없어서  혹시 그런 것이 (어떤 주의나 주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일단은 없다고 말을 하였다만 동시에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첫번째는 정말이지 그런 신념이라 할 만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몇년 전만 하더라도 스스로도 감당 못할 각종 신념을 짊어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 차이 내지는 간격으로부터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하는 놀라움이 찾아왔던 것이다. 이에 며칠간 여기에 대하여 생각 정리를 해 보았다.

 

전자는 답을 하기가 비교적 쉬워 보인다.

어려서부터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던 나는 20대 초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외로움에 그저 혼자 있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아무나'가 아닌 뭔가 '괜찮은' 사람을 만난다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가설을 세웠다. 문제는 심지어 그 괜찮다의 기준도 모르면서도 그 가설이 다음의 가설로 이어졌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만약 누군가가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왜 나랑 얽혀야 하는가"

 

그 뒤로 삶의 근본적인 목표에 그 상대방 입장에서 불공평하지 않을 '괜찮은 사람'이 되자는 것이 입력되게 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위에 언급한 '두번째'인 셈이고. 이런 방향성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분명 좋은 변화를 이끌어 낸 면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으며, 부적절한 방식이었다.

 

그 이유는 대표적으로 몇가지만 들면 우선 절대적인 괜찮음이라는 것은 모호하며 특정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A라는 사람에게는 좋은 인연이 B에게는 악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또한 아무리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자는 것을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설정해 놓는다고 하더라도 신념이라는건 때로는 가시 같아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대방 역시 찌르는데 이건 '괜찮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그 무거운 짐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도 말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어느순간 그 많은 것들이 집착 혹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만 해 두겠다. 한순간에 왔다기보다는 서서히 스며들어온 것이라 할 말이 너무 없거나 너무 많아서 여기 쓸 수 없다. 심지어 '나 답다'라고 하는 것도 어떤 일시적인 상황과 조건 속에서의 모습이라고 여긴다면 그 모든 것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삶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사람의 눈은 여러가지 이유로 가려지는데 정작 가리워진 사람은 제 눈이 가려진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하지만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속에 변해가는 나 라는 것의 존재가 있다는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이전에 거쳐온 삶의 경로로 인하여 가지게 된 어떤 경향성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못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앞서 질문의 순간 '상식적으로' 대답했어야 할 것과 가까운 영역이 바로 이 부분이었던거 같은데 생각해보니 나오는 것들이 있었고 일부를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 혹은 저러해야 한다를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함 가급적이면 이해를 바탕으로 너는 이럴 수도 있었고 저럴 수도 있었구나 를 하고자 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률 - 너가 받고싶은대로 남에게 행하라, 혹은 너가 싫은거 남에게 하지 마라 - 은 1번이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선이라 생각하여 지키고자 한다.

3. 나의 양심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괜찮음을 추구한다. 보통 여기서 양심을 건드리는 사안은 자기를 위하여 타인을 해치는 사안이다.

4. 보통 뭔가를 보고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보는 것. 그럼 많은 경우 닮음꼴이 내 안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약간의 부끄러움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의 관대함을 얻게 되는 효과가 있다.

5. 또 다른 절차는 어떤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사안을 들으면 가급적 쌍방의 의견을 모두 듣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

6. 보통 나를 위하여, 혹은 내가 마음 편하고 기꺼운 일이면 악에 기울 가능성이 크고, 남을 위한 일인데 내가 불편하고 귀찮으면 선에 기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이렇게 언어화시켜서 늘어놓고 보니 나는 적당히 관대하고 원만하나, 최소한의 선은 지향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신념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는 다소 빗나간 구석이 있지만 누군가가 신념이 있으면 그로 인하여 어떠한 선택들을 하고 그것들이 모여서 그 사람만의 색채를 가진 삶을 산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싶다고 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최소한의 '선' 내지는 '괜찮음'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여기에 대해 '이것은 저것이다' 라는 식으로 고정하는 대신 평생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매 순간 회의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태도이며 '선' 이라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과 그에 임하는 태도를 통하여 불완전하게나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려놓고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삶과 운명에 대고 나의 작은 지혜를 내세움은 달빛 앞에 개똥벌레의 빛을 견주는 것이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더욱 넓어지는 빈틈 사이로 자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면 이게 '0.5번' 신념일 것이며 앞서 번호를 매긴 것들의 대다수가 실체가 아닌 절차 내지는 판단의 과정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것과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나의 신념은 일반적인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 개인의 불완전성에 근거하여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그 해석이 확정되거나 독점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기에 나 혹은 남을 얽어매는 어떤 주의나 사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어떠한 확신으로도 굳은 머리가 되지 않는 것, 끝없는 회의와 의심 속에서 유연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 매번 인생의 갈림길마다 처음부터 헤매지 않기 위해 몇몇 절차적 원칙, 당연히 이것 역시나 때때로 의심의 대상, 들을 지키고 사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너의 신념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목록 중 일부를 말해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게 알고 싶어한다면, 나의 신념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한 탓에 그 목표로 향하는 길이 평탄하지 못하며 자주 안개에 싸여있을 것인데 그 위를 내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헤매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감히 짐작컨대 내 마음은 탁 트인 답을 바라지만 어쩌면 그 길 위가 내가 가야 할 목적지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함께. 

 

이것을 발견하고 정리하는 순간 즐거웠고, 돌이켜보니 이에 이르는 길도 반복적으로 단조로운 일상에 하나의 산책로가 되었기에 감사의 말을 남겨본다.

 

p.s.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0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입밖에 내는 말로서는 그날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인데 음악이 끝나면 소리가 흩어지고 기억에서나 울리듯,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좋다고 여겨 따로 적지 않는다. 다만 빛은 그림자를 동반하듯, 타자의 존재는 스스로를 향한 의심의 좋은 원천이라는 점을 덧붙이면 0과 1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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