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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술 이야기

손록당 조사야(祖師爺) 일대기 (3)

마지막 편입니다. 출처는 앞서의 두 글과 같습니다.

 

 

손가태극권

 

태극권, 형의권, 팔괘장을 연구한지 수십 년 후 손록당은 손가태극권을 만들어내었다. 손검운은 손가태극권에 팔괘장의 보법과 형의권의 다리기술과 허리기술, 태극권의 유법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손록당노사의 태극권

 

손록당은 그의 태극권을 매우 잘 알게 되었고 그의 능력으로 이를 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손록당의 기술은 널리 알려졌고 마침내 그 소문은 일본까지 다다랐다. 한 일본의 유명한 무술가는 손록당의 기술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고 손록당과 겨루기위해 그를 일본에 보내주도록 천황을 설득하였다.

 

1921년 일본의 무술가는 손록당을 방문하였고 통역인을 통해 이야기했다.

“나는 당신이 유로 강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중국무술을 수련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강입니다. 나는 당신과의 겨루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손록당은 통역을 향해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손님이니 나는 그의 결정을 따르겠다.”

“나는 강한 힘으로 당신의 팔을 꺾어 부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유의 힘이 그것을 제압할 수 있다면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손록당은 키는 5피트 7인치였고 그 일본인 무술가의 어깨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손록당은 가벼운 보법으로 그의 꺾기를 벗어나기도 하고 팔을 가볍게 흔들어 그의 꺾기에서 벗어나가도 하였다.

 

도전자는 “나는 당신이 돌아다니지 않고 이 기술을 제압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손록당은 “나는 당신이 원하는데로 해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손록당은 구경꾼들을 모두 가구 옆으로 움직이게 하고 바닥에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손록당은 “나는 여기 바닥에 누워있을 테니 당신의 제자는 나의 발을 잡고 당신은 나에게 기술을 거시오. 나의 다른 쪽 팔은 나의 등 뒤로 돌리지요”라고 말했다. 손록당은 바닥에 누웠고 일본인 무술가는 손록당의 팔을 잡았다. 통역인이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셋을 외침과 동시에 손록당은 그의 자유로운 팔을 등 뒤로부터 끌어당겨 공격자의 복부에 점혈공격을 가했다. 이 점혈에 의해 일본인 도전자는 소록당의 팔을 놓쳤고 손록당은 뛰어 일어났다. 일본인 도전자는 쉽게 쓰러지지 않고 손록당을 따라갔다. 손록당은 그의 다른 혈을 몇군데 공격하여 그를 책장에 내던져 버렸다. 책장이 도전자의 머리위로 쓰러졌다. 통역자는 소리쳤다.

 

“그를 다치게 했어요.”

 

손록당은 “그는 괜찮을 겁니다. 그가 일어나서 숨을 헐떡일 때 말해주시오. 다시 한 번 하자고요.”

상대는 패배를 인정했고 다시 하기를 거절하였다. 매우 가벼운 공격으로 매우 무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손록당의 능력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한번은 손록당이 골격이 큰 이씨성을 가진 제자를 손으로 민 적이 있다. 그 제자는 덩치 작은 손록당이 자신을 손쉽게 조절하는 것에 매우 화가 났다.

 

그는 “그는 나보다 훨씬 작으니 내가 그를 후려친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제자는 발경을 시도하였고 손록당은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되받아쳤다. 공격하던 것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 제자는 나가버렸다. 몇 시간 뒤 손록당이 자신의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그 제자가 돌아왔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며 말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손록당은 “네가 나를 공격했을 때 나는 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 제자는 손록당에게 사죄하였고 손록당은 “너는 내상을 입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글을 적은 종이를 제자에게 건네주며 “이 처방을 가지고 집으로 가서 쉬어라”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 제자의 팔은 완전히 부서졌다.

 

손록당의 둘째 아들은 그 제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공격을 시도했다는 것에 매우 화가 났다. 훗날 손록당에 상해에 여행을 갔을 때 아들과 함께 그 제자를 만났다. 손록당의 아들은 “이 자는 아버지를 해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또 다시 그럴 겁니다. 왜 그에게 잘 대해 주십니까?”라고 말했다.

손록당이 말했다.

“네가 틀렸다. 그는 내가 자신을 심하게 상처 입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작은 것을 경험했을 뿐이지만 내가 그의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덕성을 길러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나를 존경한다.”

 

1923년 손록당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자신의 셋째 아들 손환민(孫煥敏)이 1992년 상해에서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다. 서세창은 손록당에게 한 달 간의 휴가를 주었고 손록당은 상해와 항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 있는 동안 손록당은 100명이상의 제자를 거두었다. 1923년 말 그의 네 번째 저서인 권의술진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1924년 그는 정부의 일을 그만두고 무술수련을 지도하기 위해 산서성으로 갔다. 그해 7월 손록당의 네 번째 저서가 출판되었다. 1925 1월 이전 그의 다섯 번째 저서인 팔괘검학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1927년 11월 팔괘검학이 출판되었다.

 

손록당노사의 저서

 

1928년 남경의 국술관 관장이었던 장지강(張之江)과 부관장 이경림(李景林)이 손록당을 방문하여 상해에서 무술을 가르치길 청했다. 손록당은 제자 양세원(楊世垣)과 함께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1924년 손록당의 제자 진미명이 상해에서 태극권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일대에서 태극권이 잘 알려져 있었다. 손록당은 상해에 도착한 후 잠시 진미명의 집에서 머물렀다. 후에 손록당은 남경으로 떠났고 국술원 내가문 고문이 되었다.

 

1928년 가을 강소성 국술관이 설립되었다. 국술관의 관장은 손록당을 방문하여 국술관을 관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손록당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손록당은 그의 제자 제공박, 손진천(孫振川), 손진대(孫振岱)와 함께 국술관을 관리하였다. 이 시기동안 손록당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남경과 상해, 소주, 항주를 수시로 여행하였다.

 

1930년 가공할 홍수가 강소성과 절강성을 덮쳤다. 그 영향으로 수해자들을 위한 구호금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손록당은 상해의 제자들을 데리고 수해자들을 위해 자선공연을 펼쳤다. 제자들이 시범을 보인 후 손록당은 손수 무대 위에 올라 형의권 잡식추(雜式?)의 시범을 보였다. 그의 첫 번째 주먹을 날았을 때 관중들은 그의 주먹이 지난 간 후에야 주먹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발을 구르는 소리는 마치 천둥과 같았다. 몸을 트는 마지막동작에서 손록당의 회백색 턱수염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의 시범은 자선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1931년 봄 손록당의 과거의 묶은 관습을 무시하고 절강성 무술학교에 여성 무술반을 개설했다. 16명의 여성이 이 무술반에 등록하였다. 열화 같은 반응을 본 손록당은 북경에 전보를 보내어 그의 딸 손검운에게 절강성에 와서 그 여성반에서 무술을 가르치도록 했다. 훗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1931년 손록당은 국술관의 직책을 버리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손검운노사

 

손검운은 손록당은 언제나 무술을 싸움을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는 만약 싸우고 싶다면 총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한 충고는 건강의 증진을 위해 무술을 수련하라는 것이었다. 손록당은 무술의 목적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건강을 유지하고 빨리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내력이 강하면 그가 사는 동안 병을 앓지 않게 되며 늙어서 몸이 쇠약해지면 오래 끄는 병 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국본토에서 발표된 보고에 따르면 손록당은 싸움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을 외면하였으며 그들에게 만약 싸움을 원한다면 더 좋은 스승을 찾아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검운은 자신의 부친은 무술수련에 있어서 어떠한 비밀스런 방법도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손록당은 올바른 무술수련을 중화(中化)라는 두 글자로 묘사하였다. 이는 균형 혹은 중립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가지만을 너무 많이 수련하지 말고 그와 같은 스타일을 따를 것을 권했다. 수련은 균형적이어야 한다. 손검운은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는 것처럼 수련할 때에는 균형을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손검운은 자신의 젊은 시절 손록당이 집안에서 수련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은 아주 오래된 집에 살고 있었으며 천정에서 늘어뜨린 옷가지로 방을 구분하였다고 말한다. 손록당이 무술을 수련하던 방은 그가 형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좁았기 때문에 형 가운데 재빨리 발차기를 하는 동작에서는 방을 구분하는 옷가지를 발로 찼다. 손검운은 손록당은 매우 꼼꼼하게 형을 수련하였으며 그 발차기동작에서 그는 항상 똑같은 곳을 찼다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가 발차기를 했던 옷의 부분에는 구멍이 뚫렸다. 그녀의 모친이 그 구멍을 기워놓아도 몇 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똑같은 자리에 새로운 구멍이 나 있었다.

 

팔괘장의 빠른 보법을 응용한 손록당의 능력과 빠른 보의 움직임은 전설적이다. 손검운은 손록당이 그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기억한다. 손록당의 친구가 대나무로 된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즉시 방안으로 머리를 들어밀고 누가 있는지 살폈다. 손록당은 이미 방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록당의 친구는 감탄하여 외쳤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지?” 손록당이 말했다. “팔괘장을 수련한 덕이지.”

 

“코”라는 별명을 가진 이씨 성의 유명한 무술가가 손록당에게 도전해 왔을 때의 일이다. 그의 모든 친구들은 손록당이 너무도 빨랐기 때문에 그가 미쳐버렸다고 말했다. 이씨 성의 무술가는 끝까지 버텼고 결국 손록당은 싸우기를 동의했다.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씨 성의 무술가가 싸우기 위해 준비를 할 때 손록당은 이미 그의 뒤에 가 있었고 그의 등에 발차기를 차 넣었다. 그 시합을 본 사람들은 이씨 성의 무술가에게 지금껏 손록당에게 대항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1928년 손록당은 큰 무술학교에서 무술을 가르치기 위해 상해로 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30~40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그의 무술의 시범을 보기를 열망했다. 손록당은 “당신들 중 누구라도 나를 쫓아와 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다면 무술을 가르쳐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중들은 방주 위를 돌며 손록당을 쫓았지만 그의 옷자락을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검운은 17세 되던 1931년 그의 부친 손록당으로부터 직접 빠른 보법에 대해 배웠다. 손록당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등 뒤에 지팡이를 잡은 채 중국 전역의 산더미처럼 많은 무술학교를 방문했고 어느 곳을 가든지 수련생들에게 자신을 쫓아 언덕 위를 올라와보라고 말했다. 손검운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빨리 뛰었지만 결코 손록당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상에 도착했을 때 손록당은 문간에 서 있었고 지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손록당이 말했다.

 

“모두들 쉬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군”

 

현재 85세인 북경의 팔괘권사 유흥한(劉興漢)은 젊은 시절 유빈(劉斌)에게 팔괘장을 배웠는데 손록당이 친구인 유빈을 방문하였을 때 손록당에게 팔괘장수련에 대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손록당과 유빈은 정정화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유흥한은 손록당이 자신의 주권연습을 볼 때마다 “더 빨리 더 빨리”하고 외쳤던 것을 기억한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손록당은 항상 이러한 팔괘장의 요소를 강조했다.

 

손검운은 손록당이 언제나 모친을 공손히 모셨다고 말한다. 그녀의 무덤은 손록당이 살고 있던 보정으로부터 10마일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손검운은 한번은 손록당이 매 다섯 걸음마다 모친의 묘를 향해 절을 하며 10마일을 걸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빨리 걸었고 매 다섯 걸음마다 절을 하였으며 그와 함께 간 제자들에게는 고된 시간이 계속되었다.

 

손록당의 기술시범은 속도의 한계가 없었다. 한번은 그가 강서성 국술관은 방문하였을 때 국술관의 관리가 시범을 보여주기를 청했다. 그가 있던 방은 작았고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방으로도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록당은 벽쪽으로 이동하여 벽과 바닥이 맞붙는 곳에 한쪽 발을 놓고 어깨와 팔을 벽에 붙인 채 섰다. 그는 벽에 붙어서 무릎을 들고 반대쪽 발을 가능한 한 높이 바닥에서 들어올렸다. 그의 발과 어깨 그리고 팔은 계속 벽에 붙어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별 것 아니군”하고 이야기했다. 손록당은 “왜 여러분들은 해보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와 같이 해보았지만 누구도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벽에 기대어 선 사람들은 다리의 무게를 들어 올리지 못해 그 다음을 행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손록당에게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라고 물었다. 손록당이 대답하길 자신의 몸은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중심이라고 말했다.

 

손록당의 죽음

 

손검운에 따르면 손록당은 역경을 이용하여 그가 죽을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해인 1933년 서양식 병원에 있던 독일인 의사는 손록당의 몸을 진찰해 본 후 그의 몸에 40대와 같다고 말했다(당시 손록당은 73세였다). 얼마 후 손록당은 17세 이후 머문 적이 없는 보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보정에 도착했을 때 그는 18명의 새로운 태극권 제자를 받아들였고 이들이 마지막 제자들이라고 말했다. 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만큼 가르친 후 손록당은 북경으로 돌아갔고 한 달 뒤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손록당의 친우들은 모두 죽었고 가족들은 손록당이 이러한 것 때문에 우울해 졌다고 생각했다.

 

손록당노사

 

그때 손검운은 그녀의 부모를 돌보고 있었다. 손록당의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이미 죽었고 둘째아들은 상해에 살고 있었다. 손록당은 손검운에게 “이제 우리는 보정을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곳에 묻히고 싶다. 내가 죽은 뒤에 내 시신을 옮기려면 너무 문제가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손록당과 그의 아내 그리고 손검운은 완현으로 되돌아갔고 손록당은 식음을 전폐했다.

 

그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고 말했다. 그는 단지 앉아서 묵상만 할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물만 마셨다. 손록당은 손검운에게 그가 죽은 뒤에 울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손검운에게 그가 죽은 뒤의 무술교습을 맡겼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은 잠들지 않은 상태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의 몸을 눕히고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그가 말을 하고 누운 후 그의 아들과 딸은 그를 위해 슬피 울었다.

 

어느 날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던 손록당은 그가 죽을 것을 예언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와 대화를 하려 했지만 그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며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는 세 번 눈을 떠서 몇 시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의 순간에 “모두들 잘 있거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33년 12월 16일의 일이다. 손록당이 사망한 방은 그가 태어났던 방이었다. 낡은 집은 진흙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그의 고향에 묻혔다. 1년 뒤 그의 아내도 그의 뒤를 따랐고 손록당의 옆에 묻혔다.

 

손록당이 죽기 전에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내공수련의 비밀에 대해 물어본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이야기에서 손록당은 자신의 손으로 그 비밀의 특징을 적은 후 이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죽었다고 한다. 그가 써놓은 비밀의 특징은 “연습”이라는 글자였다. 손록당이 사망할 당시 함께 있었던 손검운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손록당이 내공수련을 위한 어떤 비밀스런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열심히 수련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손록당노사의 묘비에 적힌 글

 

스스로 공부(쿵푸)를 쌓기 위해 권술을 단련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의 실력이 높고 낮음을 논하지 말고,

먼저 덕행을 쌓으며 항상 겸손하고 예의 있게 행동해라.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아라

 

손검운은 손록당에 죽음에 관련된 신비스런 이야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녀는 손록당이 죽은 지 3일후 그녀의 모친과 함께 북경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죽으면 30일에서 60일정도 장례를 치르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손록당의 몸은 아직 땅에 묻히지 않았다.

당시 가족들중 집을 떠나있었던 사람들은 손록당의 두 번째 아들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처남과 처남의 셋째 아들이었다. 손록당의 처남과 그의 셋째 아들은 1929년과 1922년에 사망하였다.

 

얼마 뒤 손검운은 떠났고 손록당의 둘째 아들 손존주(孫存周)는 이웃을 방문하고 있었고 손존주의 아내만이 집에 남아 있던 날이었다. 30정도로 보이는 낯선 사람이 찾아와 그곳이 손록당의 집인지 물었다. 그녀는 그곳이 손록당의 집이 맞지만 최근 죽었다고 말했다. 젊은 남자는 얇은 봉투를 내밀며 “몇 주 전 나는 다리위에서 흰수염의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 봉투를 주면서 오늘 손록당의 집을 찾아가 작은 방에 있는 친척에서 이 봉투를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고 말했다. 그 봉투를 받은 손존주의 아내는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손존주가 도착하여 그 젊은 남자를 보았을 때 손존주는 “이게 다 뭐야? 우리는 당신을 몰라”라고 말했다.

 

그 젊은 남자는 그 봉투에 대해 설명했지만 손존주는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고집 센 사람이었고 이 젊은 남자가 손록당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도 않은 유족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젊은이에게 봉투를 갖고 꺼지라고 말했다. 그 젊은이는 “만약 당신이 이 봉투를 받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손존주는 말을 듣지 않았고 젊은이는 떠났다.

 

그때 손록당의 제자 몇몇이 집에 모여 있었고 손존주가 그 봉투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 그 젊은 남자를 쫓아갔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손검운은 그 봉투가 있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것이 손록당이 보낸 어떤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손록당의 셋째 아들 손존주도 무술에 뛰어났다. 손록당의 첫째 아들 손성일은 무술에 관심이 없었고 많이 배우지도 않았다. 손성일은 1891년경 태어나 1929년 병으로 죽었다. 손록당의 세 번째 아들 손환민은 무술을 배웠고 그의 아버지의 무술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지만 1922년 상해에서 사고로 죽었다. 그는 높은 봉에서 체조연습을 하던 중 떨어져 늑골이 부러졌다. 부러진 늑골이 내장을 찔렀고 손환민은 합병증으로 죽었다.

 

손존주는 고집 센 사람이었고 젊은 시절 매우 거만했다. 훗날에는 거만스러움이 줄어들었는데 중국에는 그가 겸손하게 된 이야기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손록당이 북경에 있을 때 그의 무술은 천하무적이었고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어디에서든 사람들은 그에게 무술을 배우려했고 그의 제자라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손존주는 손록당과 같은 대접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지혜가 부족했다. 젊은 날의 손존주는 참을성이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무술은 그를 호전적이고 무정한 싸움꾼으로 만들었다. 그는 항상 싸움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우해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손존주노사

 

어느 날 북경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그 도시에서 싸움꾼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얼마 뒤 손존주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는 즉시 그 낯선 사내를 찾아가 시합을 청했다. 그는 시합에 동의했고 손존주는 갑자기 그를 공격했다. 그 사내는 잽싸게 몸을 피하며 그와 동시에 손존주의 한쪽 눈을 잡아 뽑았다. 그는 손존주를 훈계하며 말했다.

 

“오늘은 당신에게 행운의 날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당신에게 행운이다. 당신이 위대한 명성을 가진 손록당의 아들이 된 것도 행운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한쪽 눈만 상하게 하고 다른 한쪽을 남겨둔 것도 매우 큰 행운이다. 이제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한쪽 눈마저 잃으면 당신은 당신 인생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며칠 뒤 손록당은 그 낯선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아들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모진 고난을 주어 그처럼 절실한 교훈을 준 것에 감사했다. 이것은 매우 위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손검운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손존주가 눈을 잃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고에 의한 것이지 싸움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손존주가 한쪽 눈을 잃은 이후에는 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쪽 눈이 없다는 것은 싸움에서 크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손존주는 한쪽 눈을 잃은 후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가 눈을 잃은 것은 다른 사람과 싸우다가 잃은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봉투와 함께 다른 손록당의 중요한 기록도 사라졌다. 손검운은 손록당이 60세까지 계속 일기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대신 모든 것을 글로 기록했다. 그가 스승에게 어떻게 무술을 배웠는지, 누구를 가르쳤는지, 누구와 싸웠는지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내용이 일기 속에 들어있었다. 손록당이 환갑이 되던 해에 수많은 제자들이 북경을 찾았다. 손록당의 일기는 손록당의 집 서가에 있었다. 환갑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그의 일기는 사라졌다.

 

손록당이 죽은 후 손검운은 신문에 누구든 그 책을 가져간 사람은 제발 그 책을 돌려줄 것이며 만약 그 책을 돌려주면 모든 제자들이 볼 수 잇게끔 만들겠다고 글을 실었다. 일기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후에 그녀는 함께 동거하고 있던 제자 중 한명이 이것을 가져갔고 그것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훗날 손검운은 마침내 그 아들을 찾아냈지만 문화혁명으로 일기가 사라져버린 후였다.

 

손록당의 무덤은 문화혁명 동안 모진 고난을 당했다. 1966년 홍위병은 손록당의 무덤을 유린했다. 그들은 손록당은 매우 유명했기 때문에 그는 부자일 것이며 많은 가치 있는 부장물들이 함께 묻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것은 동전 몇 닢과 손록당의 검이 전부였다. 그들은 동전은 가지고 검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주변에 사는 누군가가 그 검을 회수하여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 훗날 그 검은 손검운에게 건네졌고 그 후 그녀는 그 검을 정부에 국보로 기증하였다. 손가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손검운이 손록당의 무덤을 복원하는 것을 도왔다.

 

손검운은 80살이나 되었지만 매우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손록당이 항상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결코 자랑하거나 거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손록당이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것은 7세에서 9세사이의 기간뿐이었지만 그는 학자로서 존경받았다. 그는 일생동안 다섯 권의 저서를 남겼다. 첫 번째 저서인 형의권학이 1915년이 출판되었고 두 번째 저서인 팔괘권학이 1916년에 출판되었으며 태극권학은 1921년에, 권의술진은 1924년에 그리고 팔괘검학은 1927년에 출판되었다. 손록당이 죽었을 때 그는 자신의 여섯 번째 저서의 원고의 집필을 2/3정도 마친 상태였다. 이 책의 제목은 형의창학인데 출판되지는 않았다.

 

손검운의 말에 따르면 중국의 마지막 과거에서 급제했던 학자가 있었다. 그는 손록당의 책을 읽은 후 무술가는 결코 그렇게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무술가들은 대부분 문맹이었으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손록당을 방문하여 말했다. “당신은 이 책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누가 당신을 위해 이 책들을 썼습니까?” 손록당은 그가 그 책을 썼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손록당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고 하루 종일 고전문학, 역경, 수학 등을 가지고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떤 것으로도 손록당을 몰아붙일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당신은 무술과 학문 양쪽 모두의 대가이군요”라고 말했다

 

p.s. 발차기 일화와 비슷한 것인데, 사부가 중국에 있을때 사조님의 보폭은 발자국이 찍히거나 하는 것을 보면 항상 자로 잰듯이 같았다고 한다. 사형제들(나에게는 사백 혹은 사숙 어르신들 되겠다)이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한지 묻자 그저 매일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곽운심 노사의 말씀이 있는데 정확한 워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형의권의 도는 그저 평상의 도와 같은데 다만 쌓이고 쌓여서 공을 이룬다고 한 말씀이다. 그저 사람이 도를 멀리함이지 도가 사람을 멀리함이 아니라는 중용의 말이 그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인상깊게 머리에 남아 있다.

 

p.s.2 경공술과 비탈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역할 때 쓰고 나온 보안서약 위반일듯 하여 생략.. 결론은 정말 맞는 말이라는 것 + 트레드밀이 심심하고 무릎이 젊다면 경사를 줘 보라는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