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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술 이야기

손록당 조사야(祖師爺) 일대기 (2)

출처는 (1)편의 서두에 밝힌 바와 같습니다.

 

 

곽운심을 만나다.

 

 

이괴원이 곽운심에게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가 중년이 되어서의 일이며 비록 그의 무공이 높다할지라도 그의 스승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1882년 봄 이괴원은 곽운심을 만나기 위해 손록당을 심현으로 데려갔다. 곽운심은 손록당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했고 이괴원도 그의 형의권수련을 계속하기 위해 함께 머물렀다.

 

손록당은 새로운 스승과 함께 있기 위해 이사를 했고 하루 종일 형의권을 수련하였다. 손록당의 형의권을 보았을 때 곽운심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곽운심은 손록당은 형의권중 원숭이형상의 기술에 특히 능하다고 말하며 손록당을 활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는 손록당의 선천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고 결국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이괴원의 수준을 능가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술수련을 시작한 첫해에 곽운심은 손록당에게 새로운 무술은 별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대신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수련을 살펴보고 교정하였다. 손록당이 수련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밤 곽운심은 어두운 그늘에서 달려 나오며 붕권으로 손록당을 공격했다. 손록당은 본능적으로 그가 배운 원숭이형태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10피트나 뒤로 뛰었다. 곽운심은 손록당의 그 같은 훌륭한 반응에 크게 기뻐했고 그때부터 더욱 철저하게 그를 가르쳤다.

 

손록당이 그와 함께 무술을 수련하는 동안 곽운심은 농장을 운영하며 손록당과 함께 생활했다. 곽운심은 때때로 말을 타고 먼 곳까지 여행을 떠나곤 했다. 곽운심은 손록당의 스테미너와 힘을 키우기 위해 말 옆에서 팔을 곧게 뻗고 말꼬리를 팔위에 걸친 채 걷도록 하였다. 말이 뛰어갈 때도 손록당은 자신의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는 일화도 있다. 손록당의 딸 손검운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그것은 우스운 소리다. 누구도 말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손록당에 대한 글과 책들에는 그가 말을 따라 여행한 거리와 속도를 매우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

 

후에 곽운심은 그가 자신의 스승 이능연에게서 받은 형의권 서적을 손록당에게 주었다. 손록당은 무릎을 꿇고 그 책을 받은 후 언제나 형의권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손록당은 곽운심의 형의권 전인이 되었다. 손록당이 곽운심과 함께 했던 시간은 8년이었으며 곽운심은 손록당에게 새로운 차원의 무술을 접하기를 원한다면 팔괘장을 수련함으로써 신묘한 기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곽운심은 자신의 친구인 정정화에게 팔괘장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손록당을 북경에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가 1889년이었다.

 

곽운심과 정정화는 둘다 하북성 심현사람이다. 심현은 하북성의 남쪽 중앙, 보정의 남쪽, 하북성의 중심도시 석가장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하북성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도중 심현을 거쳤다. 청대와 중화인민공화국시절 치안력은 큰 도시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심현이나 다른 시골의 현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빈번하게 출몰하는 산적이나 도적들로부터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했다. 심현과 같은 지역에는 많은 뛰어난 무술가들이 표국에서 일을 하거나 경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여행자들은 산적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그들을 고용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지역의 하북출신 무술가들은 매우 뛰어났다. 이낙능, 곽운심, 정정화, 유기란(劉奇蘭), 이존의(李存義), 왕복원(王福元), 경계선(耿繼善), 왕향재같은 사람들은 모두 심현 출신이며 그곳은 손록당이 곽운심에게 형의권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양징보, 손록당, 류백천, 이경림, 두심무, 정좌평, 전조린

 

곽운심과 정정화는 동향이기 때문에 정정화가 북경으로 가서 팔괘장의 창시자 동해천에게서 팔괘장을 배우기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개인적으로 서로를 알지 못했더라도 다른 누군가로부터 서로의 명성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 중에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1800년대 후반 팔괘장은 북경에서 매우 인기 있었고 창시자 동해천은 유명했다. 자신의 형의권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던 곽운심은 북경으로 가서 동해천의 무술을 시험하고자 했다.

 

곽운심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그는 먼저 정정화를 방문했다. 동향출신이기 때문에 정정화는 곽운심을 반겼고 함께 머물렀다. 정정화가 곽운심에게 북경까지 온 목적을 물었을 때 곽운심은 동해천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말했으며 정정화의 생각을 물었다. 정정화도 곽운심의 형의권이 매우 뛰어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해천은 결코 꺾을 수 없다며 곽운심에게 동해천에게 도전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곽운심은 정정화를 쳐다보며 “형제, 나의 붕권을 한번 경험해 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정정화에게 주먹을 날렸다. 정정화는 재빨리 몸을 피했고 곽운심이 날린 첫 번째 붕권은 문기둥을 때렸다. 문기둥은 조각나 버렸다. 곽운심은 정정화의 속도와 민첩함에 크게 놀랐으며 동해천은 정정화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동해천에게 도전하고자 했던 생각을 버렸다.

 

곽운심과 정정화는 서로의 무술을 깊이 존경했고, 그들의 무술을 보다 뛰어나게 다듬기 위해 각 무술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들에게 서로 무술을 가르쳐주기로 동의했다. 그 결과 손록당은 형의권을 배운 후 정정화에게 팔괘장을 배울 수 있었다.곽운심이 동해천에게 도전했던 이야기 가운데는 곽운심과 동해천이 실제로 싸웠다고 말하는 것도 있다.

 

그 이야기에서 곽운심과 동해천은 3일간 싸웠다고 한다. 첫째 이야기에는 이틀째 되던 날까지 곽운심은 동해천의 방어를 뚫지 못했으며 삼일 째 되던 날 동해천은 곽운심을 공격하여 곽운심을 상처 없이 제압하여 그의 오만한 콧대를 꺾었다고 한다. 둘째 이야기에서는 서로의 기술에 감명을 받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서로가 수련생이 되어 상대방의 무술을 배웠다고 한다. 하북성에 있는 팔괘장과 형의권학교의 무술고수들과 중국본토의 무술학자들의 대부분은 이 같은 우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곽운심과 동해천은 결코 싸우지 않았다.

 

 

손록당이 팔괘장을 배우기 시작하다

 

 

손록당은 정정화에게 팔괘장을 배우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것에 매우 관심이 많았지만 먼저 보정으로 돌아가서 그의 모친과 학자 장씨 그리고 그의 딸에게 좀 더 결혼을 미루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약속을 얻어낸 손록당은 정정화에게 팔괘장을 배우기 위해 북경으로 출발했다. 정정화는 손록당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에게 팔괘장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손록당의 나이는 30살이었다.

 

손록당노사의 팔괘장

 

정정화는 손록당에게 주권을 보여줌으로써 팔괘장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손록당이 얼마간 팔괘장을 수련한 후 정정화는 손록당에게 팔괘장의 대련기술 몇 가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손록당에게 주저하지 말고 공격하라고 말했다. 손록당은 붕권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정정화는 팔괘장의 신묘한 보법을 이용하여 재빨리 그의 공격범위에서 빠져나갔고 동시에 그는 손록당의 등 뒤에 있었다.

 

손록당은 공격을 계속했지만 그가 정정화를 향해 움직일때 마다 정정화는 손록당의 뒤에 와 있었다. 결국 손록당이 정정화를 공격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손록당의 몸은 정정화의 쌍당장과 부딪쳤고 손록당은 날아가 버렸다. 손록당은 정정화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신의 무술에 실망했다. 정정화는 손록당에게 자신은 팔괘장의 가장 기본적인 것만을 사용하였을 뿐이며 팔괘장의 기술들은 그가 본 것보다 훨씬 심오하다고 말했다.

 

정정화의 아들 정유신(程有信)에게 팔괘장을 배우고 북경에서 형의권과 팔괘장을 가르치고 있는 양극권(梁克權)은 손록당이 정정화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 초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양극권은 손록당이 정정화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 첫해에는 몇 가지 자세와 주권만을 연습하도록 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손록당은 어깨너머로 배운 다른 것도 수련하였다. 그 장소는 오래된 대포들이 있던 자금성의 뒤편이었다. 손록당은 매일 이 대포들을 치면서 연습을 했고 몇 달이 지난 후 손록당이 대포를 쳤을 때 수백 근이 넘는 대포가 조금씩 움직였다.

 

손록당이 정정화에게 무술을 배운지 거의 1년이 되었을 무렵 중국 남부의 유명한 무술가가 정정화에게 도전하기 위해 북경으로 왔다. 정정화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을 내보내어 그와 싸우게 하였는데 정정화의 제자들은 그 남부사람에게 모두 패하였다. 정정화는 자신의 명성이 실추된데 매우 화가 나서 그 스스로 그와 싸우려 했다. 정정화가 떠나려 할 때 손록당은 그를 제지하며 “제가 그와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정화는 “너는 단지 주권을 연습하였을 뿐인데 나의 제자들을 제압한 그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말했다. 손록당은 “그는 모두를 제압했으니 그가 나를 제압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부님을 제압하면 사부님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정정화는 그를 찾아가서 그에게 한 번 더 자신의 제자와 시합을 하자고 말했고 손록당이 그의 앞에 섰다. 싸움이 시작되자 손록당은 도전자의 주변을 움직이다가 자금성의 뒤편에서 대포를 칠 때와 같이 재빨리 그를 공격했다. 손록당은 그를 매우 강하게 쳤고 그는 건물의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정정화는 매우 기뻐하며 그가 앉아 있던 긴 의자를 철썩 때렸는데 그 의자는 반으로 부서져 버렸다. 그 남쪽 무술가는 정정화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남부사람이 위대한 정정화에게 패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손록당은 정정화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을 모두 기록하였고 이것은 훗날 그가 저술한 팔괘장에 관한 책의 토대가 되었다. 정정화에게 무술을 배운지 3년 후 손록당은 팔괘장법과 팔괘검, 팔괘창에 익숙해 졌다. 정정화는 손록당이 매우 빨리 무술을 배웠으며 그것은 그가 가진 선천적인 재능과 그의 무술적 배경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록당이 정정화에게서 3년간의 수련을 마쳤을 때 정정화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젊은 날의 손록당노사

 

정정화는 “나는 백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쳤지만 손록당처럼 영리하고 열심히 수련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나는 그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전해 주었으며 이제 그의 무술은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말했다. 정정화는 손록당에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시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록당은 떠나는 것이 별로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정정화는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정정화는 손록당에게 그의 무술은 마치 싸움에 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짓지 않으며 “우리 류파의 실전기술은 주역의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네가 신묘한 경지에 오르길 원한다면 주역의 기원을 공부하고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사천성의 몇몇 사람들이 역경이론의 기술에 뛰어나다 것을 알고 있다.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말했다.

 

그가 떠나기 전 정정화는 손록당에게 “자만심은 항상 너를 다치게 할 것이며 겸손하면 항상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정정화는 그에게 “록당”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때부터 그는 무술계에서 손록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손검운은 손록당이 이름을 바꾼 것이 훗날 그의 인생에서 혼란을 가져오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정정화의 팔괘장 제자들 가운데 천진에서 팔괘장과 형의권을 가르치는 주옥상(周玉祥)이라는 사람이 있다(주옥상은 이존의에게서 형의권을 배웠다). 손록당이 천진에 있을 때 주옥상을 방문하였다. 비록 같은 문파에서 팔괘장을 수련하였지만 그들은 같은 시기에 정정화에게서 무술을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난 적이 없었다.

 

손록당이 주옥상의 무술학교에 들어섰을 때 주옥상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손록당은 “나는 손록당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주옥상은 손복전이라는 이름만 알뿐 손록당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주옥상은 그가 무술을 수련했는지 물었다. 손록당은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예, 저는 소림권을 수련했습니다.”

 

주옥상은 이 방문객이 소림권을 수련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무술이 더 뛰어나다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나에게 당신의 소림권을 보여주시오.”라고 말했다. 주옥상은 손록당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손록당을 공격했고 손록당은 그의 무술에 응할 수 있었다. 손록당은 자신의 무술을 응용해서 기술을 펼쳤다.

 

주옥상은 “그것은 소림권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다시 한 번 해봅시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주옥상은 좀 더 강하게 공격을 했고 정말로 그를 치려고 했다. 손록당은 이 공격을 피하며 주옥상을 가볍게 공격했고 주옥상의 머리는 종이로 된 천정을 들이받았다.

주옥상이 말했다. “그것은 소림권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형의권임을 알고 있다. 너는 누구냐?” 손록당은 “나는 당신에게 내가 손복전으로 알려진 손록당임을 이야기했습니다.”고 대답했다. 주옥상은 “이제 당신이 누군지 알겠습니다. 우리는 사형제군요.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하며 그의 버릇없음을 사죄했다.

 

손록당과 이존의의 다른 제자인 마옥당(馬玉堂)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친밀한 조우가 있었다. 손록당이 하북성의 한 관리의 경호원으로 일할 때였다. 손록당과 마옥당은 서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만난 적은 없었다. 마옥당은 어느 정도 장난꾸러기로 알려져 있었다. 손록당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방문했을 때 마옥당은 그와 만나기를 원했다. 어느 날 밤 마옥당은 손록당의 고용주로 알려진 관리를 알아보았다. 마옥당은 손록당의 얼굴을 몰랐지만 그 관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남자가 손록당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관리가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손록당은 건물 밖의 좁은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옥당은 그의 뒤로 돌아가 거짓공격을 펼쳤다.

 

손록당은 재빨리 몸을 돌려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마옥당을 움켜잡았고 마옥당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록당이 “너는 누구냐?!”라고 외치자 마옥당은 “나는 마옥당이다. 우리는 같은 형의권문파다.”라고 대답했다. 손록당은 “그래. 나는 당신에 대해 들었고 당신이 그 같은 방법으로 나를 공격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은 당신뿐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둘은 큰소리로 웃었고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손록당이 스스로를 버리다

 

 

1891년 말 정정화의 곁을 떠난후 손록당은 사천성으로 가라는 스승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끈기 있게 자신을 기다려온 장연현과 결혼했다. 하북성 딩싱시에서 결혼한 손록당은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많은 농부들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에게서 무술을 배웠다. 그는 거기서 3년간 무술을 가르쳤고 첫째 아들 손성일(孫星一)을 얻었다.

 

1894년 손록당은 정정화의 조언대로 사천성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사천에 머물 때 손록당은 역경과 아미기공(峨眉氣功)을 배우고 있는 지정(知貞)이라는 승려를 만났다. 사천성에 잠시 머문 후 손록당은 하북현 무당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무당산 도교사원의 도사인 정허(靜虛)에게서 신선술을 배웠다. 그 도사는 손록당이 계속 도교사원에 머물며 공부하기를 바랐지만 손록당은 집을 떠난 지 2년 후 다시 부인과 아들에게 돌아왔다. 사천성과 하북성을 여행한 후 손록당의 무술은 더욱 완벽해졌고 문학적 재능은 크게 진보하였다.

 

 

산서성에서의 손록당노사

 

아내에게 돌아온 1896년 손록당은 보정근처에 있는 그의 고향으로 이사했다. 고향에 도착한 손록당은 복양권사를 설립했다. 손록당은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언제나 손님을 즐거이 맞았다. 보정에 살고 있던 손록당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한명중에 제공박(齊公博)이 있었다. 제공박이 손록당에게 형의권을 배울때 그는 3년간 삼체만을 배웠다. 중국의 수많은 형의권의 대가들은 형의권을 수련하고자 하는 사람은 삼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오늘날 보정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무술가들이 손록당의 무술을 수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손록당이 무술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주민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1899년경 손록당은 고향을 떠나 북경에서 80마일정도 떨어진 하북성의 싱탕으로 여행을 떠났다.

 

손록당은 그곳에서 8년 가까이 무술을 가르쳤다. 한번은 부유한 지주가 그에게 무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손록당은 그를 정중히 대했고 그는 손록당에게 자신의 승마술을 보여주었다. 지주는 마굿간 앞마당 주변에서 말을 타는 것을 마친 뒤 손록당에게 말을 탈 수 있는지 물었다.

 

손록당은 “당신이 한 번 더 말을 탄다면 나도 도전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지주는 한 번 더 마구간 앞마당을 달렸고 손록당이 볼 수 있도록 그의 가장 뛰어난 승마기술의 시범을 보였다. 말 타는 것을 마치고 그는 손님들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거만을 떨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한 그는 손록당이 결코 그처럼 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손록당이 서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손록당이 자신의 뒤편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록당은 그가 시범을 보이는 동안 계속 거기에 앉아 있었고 관중들은 지주가 아닌 손록당에게 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손록당이 싱탕에 살고 있을 때 거기에는 뛰어난 경공 때문에 비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유명한 도둑이 있었다. 싱탕의 시장은 손록당을 찾아가 그를 잡도록 도와줄 것을 청했다.손록당은 예언가처럼 변장을 하고 마을 한가운데서 기다렸다. 그 도적이 나타났을 때 손록당을 그의 뒤를 쫓아 뛰었고 도적은 도망쳤다.

 

마을의 변두리에는 굵은 가지를 가진 키 큰 식물들이 가득한 벌판이 있었다. 추수 때가 되면 그 식물의 잔가지들은 제거되었지만 굵은 가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비적은 그 벌판으로 달려갔고 식물의 위로 뛰어올라 식물의 가지 꼭대기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그 도적은 아무도 그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손록당이 그 식물의 꼭대기를 가로질러 그를 쫓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손록당은 그 도적을 붙잡아 정부에 넘겨주었다.

 

경공수련의 보편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좁은 나무막대 위를 땅위를 달리는 것처럼 달릴 수 있는 형태의 움직임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수련은 손록당이 도적을 체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손검운은 그녀의 부친이 젊은 시절 소림권을 배울 때 경공을 수련하였을 뿐 아니라 팔괘장과 형의권을 수련할 때에도 경공수련을 계속하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경공을 발전시키는 기술 중 하나는 비탈길을 빨리 올라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차차 경사를 증가시켜 이것이 수직이 될 때까지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손록당이 100피트의 성벽을 세 발자국 만에 올라갈 수 있었으며 꼭대기에 도달해서는 잽싸게 몸을 돌려 뒤로 뛰어내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손록당이 그 성벽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1907년 북쪽 세현의 총독이었던 서세창(徐世昌)은 손록당의 무술과 뛰어난 지능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국기를 전파한다는 명목하에 손록당을 중국북부로 초청하였다. 손록당은 이존의의 제자였던 그의 젊은 사제 이문표(李文彪)와 함께 총독의 초청을 받고 북쪽의 봉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록당은 중국 북동부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도둑을 쳐부쉈다.

 

그곳에 도착한지 2년째 되던 해 손록당은 유럽인과 시합을 벌이기 위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서세창은 손록당이 외국인들을 당황케 만들 것이라는 생각하고 그 시합을 취소하였다. 이듬해에 손록당은 중국 북동부를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중국에 무술을 장려하겠다고 마음먹은 손록당은 자신의 작은 고향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북경으로 이사하여 남의 여생의 대부분을 북경에서 보냈다. 그는 북경 동부에 집 한 체를 빌렸으며 세 개의 무술수련장을 세웠다. 그중 두개는 북경에 있었고 하나는 천진에 있었다. 그 무술학교들은 그의 사제인 이문표와 그의 제자들 중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사람들 중 한명인 이옥림(李玉琳)에 의해 관리되었다. 손록당은 새로운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가르치기 위해 북경과 천진사이를 여행했다.

 

이옥림노사 

 

그는 인근의 다른 무술학교들의 요청 때문에 짧은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죽기 한 달 전까지 그의 집은 계속 북경에 있었다. 그가 북경으로 이사를 갔을 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손록당의 딸 손검은은 1914년 7월 6일에 태어났으며 그때 손록당의 나이는 53세였다.

 

북경에 머물던 1914년 여름 손록당은 유명한 태극권사인 학위정(?爲貞)이 그의 친구인 양건후(楊建侯)를 만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학위정은 양건후의 집에 머물지 않고 여관에 투숙하였으며 후에 병을 얻었다. 손록당은 학위정을 여관에서 데려나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손록당은 집으로 의사를 데려와 학위정을 진찰하게 하였고 그를 위해 약을 지어 왔으며 그가 병에 걸려 있는 동안 그를 돌보았다. 이전까지 손록당은 학위정이 뛰어난 무술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그가 태극권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병에서 회복된 후 학위정은 손록당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무술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해서 손록당은 학위정에게 학가태극권을 배우게 되었다.

 

1915년 7월 손록당의 첫 번째 저서 형의권학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중국무술의 역사에서 중국무술과 중국철학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설명한 최초의 책이다. 손록당의 책 이전에도 수많은 서적들이 출판되었지만 손록당과 같은 방식으로 이론을 설명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선통제에게 무술을 가르쳤던 태극권사 진미명(陳微明)이 손록당을 방문했다. 손록당과 진미명은 무술이론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의 토론이 있은 후 진미명은 손록당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고 그 후 손록당에게 형의권과 팔괘장을 배웠다. 진증즉(陳?則)으로도 알려진 진미명은 손록당의 세 번째 형의권책의 서문을 썼다.

 

1916년 북경사람들 사이에서 무술에 대한 인기가 증가하였다. 손록당은 문자적인 설명과 무술시연을 선보였다. 그는 이러한 교육내용과 함께 역경의 이론, 유교, 도교, 불교의 철학을 함께 가르쳤다. 북경고등사범학교의 교장이었던 진보천(陳寶泉)도 그의 강의에 출석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강의 후 진보천을 손록당을 방문하였고 둘은 역경과 노자, 장자 그리고 신체강화를 위한 무술의 수련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둘의 이야기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진보천이 다른 사람에게 손록당을 방문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손사부의 지식과 이해는 무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고 학자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은 드물다”라고 말했다. 같은 1916년 손록당의 두 번째 저서 팔괘권학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1919년 봄 그와 오랜 면식이 있는 서세창은 손록당에게 정부에서 일을 하라고 설득했다. 1919년부터 1924년 사이 손록당은 북경에서 무술을 가르치며 정부의 일을 했다. 서세창과의 관계로 인해 손록당은 황궁에서 무술을 가르쳤고 육군 장교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인 1919년 11월 그는 진급하였고 그의 세 번째 저서 태극권학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이 시기동안 손록당의 고향지역에서는 3년간의 가뭄이 있었고 고향의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구걸해야만 했다. 손록당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고향의 부자들은 그 이자가 너무 높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돈을 빌렸다. 손록당은 그들 모두가 서명한 계약서를 가지고 있었고 높은 이자는 그들을 속박했다.

 

그해에 고향에는 비가 내렸고 모두가 많은 수확을 얻었다. 손록당은 고향으로 돌아와 모든 계약서를 태워버렸다. 손록당은 이자율이 높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고 부자들은 돈을 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록당은 어린 시절 그가 말한 것처럼 훌륭한 무술가가 되었고 고향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1921년 7월 손록당의 태극권학이 출판되었다.


p.s. 이옥림 노사가 동북지방에 체류한 일이 있는데 당시 지역의 유지가 후원하였고 그 인연으로 형의권을 전수받게 되어 손자까지 3대를 이어 내려오게 되었다. 그 손자분이 사부의 사부 즉 사조이시다.

 

p.s.2 수련 에피소드에 대해 또 한가지 들은 적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모기향을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몸에 대고 피운 채 잠들었다는 것이다. 길이가 비슷하면 다 타는데 걸리는 시간도 비슷할 것이고, 혹여 그 전에 못 일어나면 따끔하면서 깨어났을 것. 나는 나의 분야에 저 정도의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