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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술 이야기

21년의 앞자락에서 수련의 역사를 돌이켜보다. (3)

컴퓨터가 망가져서 여러 일들이 밀렸었다. 다음주나 되어야 수리가 제대로 될 듯 하다.

코로나 여파로 부품 수송에 큰 차질이 있는 모양이다.

일은 얼추 해결이 되어가서 잠시 숨돌리며 이 글을 쓴다.

글을 써서 돈을 번다면 꼭 백업을... 백업을 잘 하자.

 

맨 처음 본격적으로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은 계기는 굉장히 어이가 없겠지만 만화책이었다.

영춘권을 배우러 갔을 때 견자단 주연의 엽문을 소개받아서 보고 (많은 경우 당시에 신규 수련생들에게 있어서는 그 반대 순서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런거구나 뒤늦게 감탄하면서 더 열심히 했던 것처럼

형의권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있었으니 바로 '꼭두각시 서커스'였다.

임상 결과 호불호가 갈리지만, 만약이 당신이 호 사이드의 인물이라면 이걸 추천해준 나에게 매우 감사할 것이다.

세월 지나고 회독수가 쌓이다보니, 아쉬운 점도 눈에 띄지만 적어도 그 시점의 나에게는 그런 비판이 가능한 눈은 없었고 그저 몰입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충분히 짐작이 가겠지만 거기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가 형의권을 쓴다. 이 이야기를 언제인진 기억이 안 나지만 수련이 끝나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아저씨가 말하길 자기가 무술판에 오래 있어보니 무슨 최강이 되겠다느니 하는 등 힘 잔뜩 주고 초반에 엄청 열심히 하던 사람 치고 남아있는 인간이 드물고 오히려 저렇게 다소 유치한 이유로 혹은 별 생각없이 시작한 사람이 몇년이 지나도 계속 하더라는 말을 했었다. 사실 영춘권에 불타오른 이유가 엽문 외에도 하나 더 있지만 이건 진짜 흑역사라서 여기다가도 못 쓰겠다. 그러나 형의권을 할 때에도 충분한 동력은 되었었다. 나중에 한 80쯤 먹고도 살아있으면 그때 손자녀에게 구두로 밝힐 생각이다.

 

또한 수련터에서 듣거나 글로 보게 된 전승이 있다. 예컨대 상운상이라는 분은 원래 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직하게 파고들어서 나중에는 깨달음을 얻고 반보 붕권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운동신경이나 자질을 따지면 나는 절대로 높은 축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이어가고는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한달 나와서 배우고 한달간은 혼자서 하고(매일 했었다.)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야 주관적으로는 매우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밖에서 보면 저자식은 열심히 하는듯이 말해놓고 한달씩 건너뛰는 사람이 아닌가? 어느날 사부님이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셔서 주머니사정에 대해 말씀드리자, 있으면 내고 없으면 그냥 나오라고 하셨다. 제자를 돈으로 보지 않기 위해 본인도 본업을 하신다며.. 대신 연습을 더 열심히 하라 해서 한동안 하루에 5시간을 한 것 같다. 새벽에 2~3시간 하고 나서 학교 가서 공부하다가 저녁때 해가 지고 땅이 식으면 또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다보니 서서히 안되던게 되기 시작했다. 가령 양반다리같은거 못해서 일상이 굉장히 불편했는데 어느날 수련 이후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데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고 편하게 앉아 있는걸 자각하고 놀랐던 경험이 대표적이다. 기타 뻣뻣 증상이 많이 완화되어서 겨우 일반인 비슷하게 되었다. 아쉬운건 초반에 몸풀기를 더 열심히 했다면 진전이 빨랐을텐데 하는 점이다. 사실 이게 이 뒤의 굴곡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굴곡은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그동안 성취가 없었음은 내 외부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꾸준히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크다.

우선 고시생일때 시작했다는 점이다. 학업을 놓을 수 없어서 봄 여름에 열심히 하고 나면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 본격적으로 학원에서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고.. 그러다보면 다시 폼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수련을 하면서 뭔가 망가져가고 그리고 다음해 봄에 그걸 바로잡고... 이것 때문에 남들보다 몇년은 돌아갔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단절은 2013 쯤이었다. 그때 첫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때 열심의 근원이 어떤 독기임을 알게 되었다. 행복 속에 그게 빠져나가니 하루에 몇시간씩 그런걸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생기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모자른 감각을 양으로 채웠는데 그것조차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중간에는 상대 입장에서는 기술이 너무 잘 나와서 내 입장에서는 잘 못받아서, 또한 전날에 비가 내려 바닥이 미끄러워서.. 어찌되었든 넘어졌고 한쪽 팔을 몇달간 못 썼다.

 

2015년에 나는 군대로 상대는 해외로 유학을 떠나면서 행복했던 순간은 끝장이 나버리게 되고 수련 라이프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장교가 되면 주말이 자유롭다고 들어서 갔는데, 일이 더럽게 꼬여서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 임지도 여러 사연이 겹쳐서 원래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서울과 먼 지방으로 가게 되고 보직도 매우 힘든 곳으로 정해졌는데 이건 본문의 주제와는 연관 없으니 생략한다. 무튼 근력이 매우 필요했다는 것만 밝힌다. 이게 왜 문제냐면 형의권은 내가권에 속하는데 이건 최대한 중심을 가라앉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빼야 하는데, 감각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근력운동은 그 과정을 매우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겹치다보니 고급 권술일수록 기본 위에 새로운걸 쌓아야 하는데, 리셋 또 리셋을 거치며 비슷하게 출발한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이후에 시작한 사람들보다도 못하게 되어갔다. 몸이 리셋되는거보다 더 무서운건 마음 속에서 중요한 뭔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기본공(일종의 준비운동)도 그러하다. 즉 기초가 부실했다는 것이 결정적 원인이다. 최근에 깨달은 바가 전부 맨 처음에 듣긴 했던 것이라는걸 느끼면서 충격을 받은게 이런 연유이다. 마음도 많이 힘들었다.  오랜만에 왔을 때 너무 못하니까 뭔가 부끄럽고 하기 싫어진 때도 수두룩했다. 잡고있기엔 괴로웠지만 그게 당시의 내가 가지고 있던 얼마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놓아지지도 않았다. 공부도 당시에는 그만두기로 했었고, 악기도 손에서 놓았으며, 사랑도 날아갔다.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그동안 20대 이후의 내가 열심을 다한 것들 중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인데 그게 참으로 싫었다. 싫다는 말로는 표현이 약한데 더 좋은 말을 못찾겠다.

 

당시는 아니지만 세월이 흐른 후 보왕삼매론이라는 것을 보다가 저런 시기들이 떠올랐다. 일부만 발췌해본다.

  1.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 가라」하셨느리라.
  2.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리라.
  3.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리라.
  4.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겁을 꺾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리라. (중략)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이하생략)

 

보고 나서 감동과 위안을 받은 것과는 별도로, 당시에 좌절을 만나면서 무슨 서원을 굳게 세우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대의 마지막 조각이라서 붙잡은 것도 여러 사건들을 거친 이후에 생긴 핑계거리였을 뿐이다. 그 수많은 일이 진행되면서도 왜 놓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써놓고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은 내가 가장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시기에 삶을 놓지 않은 이유와도 같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책이라면 그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다. 더 망하든 아니면 언젠가 잘 되든 이야기라는건 끝까지 봐야 하니까, 저 너머에 작가가 있다면 수많은 욕을 퍼붓고 싶을 정도의 고구마 전개였지만 중간에 내가 먼저 덮기가 싫었다. 그러다보니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수련터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짬밥만 가장 오래 차버린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음 글에서는 계속 변죽만 울리던 '최근에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특히 아직은 나보다 못하시는 분들이 가장 못하는 그것에 대해 애매하게 써볼 생각이다.